서울의 어느 오래된 주택가, 낡은 벽돌 담장 너머로 좁은 골목이 하나 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그 골목 끝에는 이상한 찻집이 있다.
“시간이 멈춘 찻집.”
사람들은 말한다.
“그 찻집에 들어가면, 잠깐 세상이 멈춘대. 거기선 진짜 ‘마음의 차’를 마실 수 있대.”
누군가는 믿고, 누군가는 웃어넘긴다.
하지만 ‘진짜’ 그 찻집을 찾아간 사람들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그 찻집은 원할 때만 나타나니까.
#1. 소라의 이야기
소라는 29살, 프리랜서 번역가다. 요즘은 번아웃이었다.
컴퓨터를 켜는 것조차 괴롭고, 사람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퇴근길에 멍하니 걷다 보니, 익숙한 동네인데 낯선 골목을 발견했다.
“...여기, 이런 길 있었나?”
그날따라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쓸쓸한 가을 저녁, 은행잎이 발치에 뒹굴고 있었다.
소라는 조심스럽게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마주한 작은 찻집.
간판에는 분필로 적힌 듯한 글씨.
🌙 "한 잔의 시간"
문을 열자,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실내는 아늑했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 따뜻한 조명, 오래된 서적과 풍금, 그리고 카운터 너머에 선 찻집 주인.
그는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은 오래된 시간을 안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떤 시간이 필요하신가요?”
“네?”
“오늘은 어떤 마음을 다리고 싶으신지요. 이곳에선 차 대신 시간을 드립니다.”
소라는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좀 멈추고 싶어요. 모든 게.”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찻주전자를 꺼냈다.
그는 허브잎과 말린 자두 조각, 그리고 보랏빛 꽃잎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잠시 후, 잔에서 피어오른 향은 마치 어린 시절의 겨울 방 안 같은 느낌이었다.
“이 차는 ‘멈춘 오후’입니다.
한 시간이 흐르지 않는, 당신만의 고요한 시간이에요.”
소라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그리고… 정말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바깥의 소음도, 머릿속의 복잡함도, 모두.
한 잔이 끝나고 나니, 눈물이 났다. 이유는 몰랐다.
주인은 조용히 말했다.
“눈물은 잊고 있던 마음의 말입니다.”
#2. 찻집의 규칙
이 찻집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다.
-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다.
길을 잃거나 마음이 지친 날, 우연히 나타난다. - 차는 고를 수 없다.
마음에 맞는 차가 주어지며, 거기에 담긴 시간은 손님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 기억은 흐릿해진다.
찻집을 나서면, 그 경험은 꿈처럼 흐릿해진다.
단지 따뜻했던 감정만 남는다.
#3. 마지막 손님
어느 날, 찻집 문이 열리고 어떤 노인이 들어왔다.
등이 굽고, 손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혹시... 여기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차도 있습니까?”
주인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서랍 속에서 꺼낸 작은 찻잔 하나.
그 안에는 반쯤 사라진 꽃잎이 들어 있었다.
“이건 아주 특별한 차입니다. 마시면 단 한 번, 단 한 장면만 되돌아갈 수 있죠. 하지만, 그 장면에서 당신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바라볼 뿐.”
노인은 사진을 내려놓았다. 젊은 날의 사진 속에는, 그가 놓쳤던 사랑이 웃고 있었다.
“그날,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어요.”
그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눈을 감은 순간, 그는 다시 45년 전의 그날로 돌아갔다.
바람 불던 역, 흰 코트를 입고 떠나던 그녀.
말하지 못한 ‘안녕’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흘러 찻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 후로 다시는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에필로그
“한 잔의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누군가는 가끔 그 골목을 지나가다 말한다.
“어? 저기 뭐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은 흐릿하지만, 마음 한켠이 따뜻해질 때가 있다면
그날 당신은 어쩌면, 그 찻집을 다녀온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