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집의 이름은 ‘한 잔의 시간’.
시간이 멈추고, 마음이 차오르는 곳.
문을 여는 건 우연이지만,
들어가는 건 ‘준비된 마음’만이 할 수 있다.
#4. 은우 –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
은우는 17살, 고등학교 2학년.
학교에서는 ‘착한 아이’로 불렸지만,
집에서는 항상 조심스러워야 했다.
엄마는 병약했고, 아빠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그날도 시험을 망친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에서 내리고도 한참을 걸었다.
그는 무심코 돌아보지 않던 길모퉁이를 돌아섰고,
그곳에서 찻집을 발견했다.
이상했다.
몇 년째 살던 동네인데, 이런 가게는 본 적 없었다.
호기심 반, 피로 반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두운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주인을 보았다.
“어서 오세요. 고된 하루였나요?”
은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좀,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주인은 조용히 차를 내왔다.
그 안에서는 잊고 있던 라일락 향이 피어올랐다.
“이건 ‘첫 번째 기억’이에요.
당신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던 날을 담았죠.”
은우는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기억.
어린 시절, 여름날 놀이터에서 엄마가 불러주던 동요.
달콤한 수박, 손바닥에 그려주던 동물 그림.
그때의 엄마는 아프지 않았고,
자신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울었다.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눈을 감은 채로.
#5. 찻집 주인의 이야기
찻집 주인의 이름은 유진.
나이는 알려진 바 없지만, 그 눈엔 수많은 계절이 깃들어 있다.
그는 매일 차를 내리고, 사람들의 시간을 다독인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시간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익숙한 발소리가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하얀 코트에, 눈처럼 맑은 목소리.
그녀의 이름은 이설.
유진의 옛사랑이자,
이 찻집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그녀는 오래전 이 찻집에서 차를 마셨고,
“잊고 싶은 기억”을 내려놓고 떠났었다.
“내가 그때 잊었던 기억, 이제는… 다시 찾고 싶어.”
유진은 잠시 망설였다.
그가 내린 찻잔은 작고, 묵직했다.
이름은 ‘되돌린 계절’.
“마시면, 네가 잊었던 모든 감정이 돌아와.
사랑, 슬픔, 그리고… 이유.”
이설은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가에 고인 물방울은
사계절을 지나온 흔적처럼 천천히 흘렀다.
“...그땐 너무 아팠어.
그래서 너를 지웠어.
그런데 유진,
잊고 나니까 더 아프더라.”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간도, 그녀의 시간도 이제는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6. 시간의 틈 사이에서
그 찻집에는 때때로 ‘미래에서 온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름은 현수, 36세.
그는 자신이 열흘 후에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죽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시간을 멈추고 싶어 찻집을 찾았다.
주인은 조용히 말했다.
“시간을 멈출 순 없어요.
하지만... 준비할 수는 있죠.”
현수에게 내린 차는 ‘마지막 봄’이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그는 마음속으로 사람들을 떠올렸다.
엄마, 친구들, 그리고 연락 끊긴 동생.
그는 차를 다 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야겠어요.
아직 안 했던 말들이 많아서.”
그날 밤, 그는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동생에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열흘 후, 그는 죽지 않았다.
삶이 바뀐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기에 미래도 달라졌다.
#7. 그리고 오늘
오늘도 누군가는 골목을 지나간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속엔 은은한 향기가 남는다.
찻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이름 없는 골목 끝,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오늘은 어떤 마음을 드릴까요?”
주인은 오늘도 찻잔을 준비한다.
당신도 언젠가,
지친 발걸음으로 그 골목에 들어설지 모른다.
그리고 문득,
당신의 시간도 멈추고 말 것이다.
